Beethoven: Piano Sonata No. 18 in E-Flat Major, Op. 31 No. 3 The Hunt
1. I. Allegro
2. II. Scherzo. Allegretto vivace
3. III. Menuetto. Moderato e grazioso
4. IV. Presto con fuoco
Beethoven: Piano Sonata No. 27 in E Minor, Op. 90
5. I. Mit Lebhaftigkeit und durchaus mit Empfindung und Ausdruck
6. II. Nicht zu geschwind und sehr singbar vorgetragen
Beethoven Piano Sonata No. 28 in A Major, Op. 101
7. I. Etwas lebhaft und mit der innigsten Empfindung. Allegretto ma non troppo
8. II. Lebhaft, marschmaßig. Vivace alla marcia
9. III. Langsam und sehnsuchtsvoll. Adagio ma non troppo, con affetto
10. IV. Geschwind, doch nicht zu sehr und mit Entschlossenheit. Allegro
Live at Kunsthaus, Lucerne, 1965
Beethoven: Piano Sonata No. 31 in A-Flat Major, Op. 110
11. I. Moderato cantabile molto espressivo
12. II. Allegro molto
13. IIIa. Adagio ma non troppo
14. IIIb. Fuga. Allegro ma non troppo
Live at La Grange de Meslay, Tours, 1965
스비아토슬라브 리히터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18, 27, 28, 31번 (분실 녹음)
스비아토슬라프의 녹음 중 분실되었다고 알려진 테이프를 DG에서 발견하여 복원한 것이다.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4곡을 담고 있다.
베토벤 (Ludwig Van Beethoven) (작곡가)
1770년 12월 17일 독일의 본에서 세례를 받았다. 그가 태어난 날은 12월 15일이나 16일일 것으로 추정된다. 하이든과 모차르트의 고전주의 전통을 따르면서도 문학계의 동시에 작가 괴테와 실러의 작품에 표현된 새로운 시대정신을 포착했으며, 인간의 자유와 존엄을 열정적으로 부르짖던 프랑스혁명의 이상을 좇았다.
리히터 (Sviatoslav Richter)
러시아의 피아노 주자로서 작곡가겸 오르간 주자의 아들로 태어나 처음 레슨은 아버지에게 받았다. 15세 때 오데사 가극장의 피아노 반주자가 되고, 18세 때 오케스트라의 보조 지휘자를 맡았으며, 다음 해에는 첫 피아노 리사이틀을 가졌다. 22세 때 모스크바 음악원에서 겐리크 구스타포비치 네이가우스의 클래스에 입학하였다.
그의1942년 프로코피에프의 [소나타 9번]을 초연하여 프로코피에프와 우정을 맺게 된 것을 계기로 작곡가와 친분을 맺게 되었고 이후 [피아노 소나타 7번], 리히터에게 헌정한 [피아노 소나타 9번]을 초연하였다. 그는 전소비에트 음악 콩쿨 우승, 스탈린 상을 받았음에도 1960이라는 비교적 늦은 시기에 서구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리히터는 이후 정기적인 공연과 녹음을 통해 피아노 거장의 한 사람으로 인정받게 되었는데 폭넓은 예술적 교양을 지닌 음악가로서 광범위한 레퍼토리를 끊임없이 충실히 가다듬어 자신의 프로그램을 혁신해 가는 것을 명예롭게 생각하였다. 그는 국제적 순회연주보다는 알데버크 음악제, 인스부르크 음악주간, 투렌 음악제등 몇몇 특정장소에서 연주하는 것을 선호하였다. 무한하게 음영(중립성을 가진 피아노로 표현하는)의 팔레트를 자유자재로 사용하여 힘과 순수함, 엄밀함과 자유를 연결하는 효과를 구사했던 리히터는 각 작품에 대해 항상 강렬한 투시력을 갖고 적절한 내적 리듬을 표현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베토벤은 이전의 어떤 작곡가보다도 생생하게 삶의 철학을 대사 없는 음악으로만 표현해 음악의 위력을 드러냈으며, 음악형식 면에서도 위대한 혁신가였다.
그의 개인적 삶은 병든 귀에 대한 영웅적인 투쟁으로 점철되었고, 중요한 작품 중 일부는 그가 완전히 소리를 들을 수 없게 된 마지막 10년 동안에 작곡되었다. 음악가에 대한 궁정과 교회의 후원이 사라진 시대에 살았던 그는 악보 판매와 출판만으로 생계를 꾸려나가야 했다. 그는 귀족에게 종속되지 않고 자기 내면의 부름에 응한 작곡만으로 보수를 받았던 최초의 음악가였다.
그의 삶이 그러했듯이 평생 폭풍우를 뚫고 들판과 숲을 산책하곤 했던 그는 1827년 3월 26일 저녁 5시경 갑자기 천둥번개가 치는 가운데 간병변증으로 숨을 거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