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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an Getz & Kenny Barron (스탄 게츠 & 케니 배론) CD / People Time (2CD)

레이블 : Universal (지니뮤직)
바코드 : 0731451013423
출시일 : 1991/07/01
장르 : Standards Jazz
상태 : 품절
판매가 : 21,000
할인가 : 16,500 원 (160)
수량 :
CD 1
01 ) East Of The Sun (West Of The Moon)
02 ) Night And Day
03 ) I'm Okay
04 ) Like Someone In Love
05 ) Stablemates
06 ) I Remember Clifford
07 ) Gone With The Wind

CD 2
08 ) First Song (for Ruth)
09 ) (There Is) No Greater Love
10 ) The Surrey With The Fringe On Top
11 ) People Time
12 ) Softly, As In A Morning Sunrise
13 ) Hush A Bye
14 ) Soul Eyes 
스탄 게츠, 그 최후의 레코딩 People Time

내가 스탄 게츠와 연주할 때마다, 우리는 언제나 그렇듯이 피아노와 색소폰을 위한 곡(주로 발라드)을 연주했다. 1990년 여름 유럽 투어동안, 우리의 듀오 연주를 들은 몇몇 사람들이 스탄에게 제안하기를 당신들의 연주가 담긴 앨범을 만든다면 꽤나 값어치 있는 앨범일거라고 했다. 우리는 실행했고, 당신 손에 쥐어있는 이 앨범이 바로 그 결과다. 이것이 스탄 게츠를 위한 마지막 녹음이었고, 대중 앞에서의 마지막 연주였다. 그리고 그를 본 마지막이었다.
내가 스탄 게츠를 처음 만난 것은 1970년대 초반 어느 땐가 런던의 로니 스콧 클럽에서였다. 그는 오르간 연주자 Eddy Louiss와 기타연주자 Rene Thomas가 속한 트리오를 이끌었었다. 나는 그의 오프닝에 같이하는 싱어 Esther Marrow의 밴드로 거기에 갔었다. 로니 스콧에서 함께한 2주동안, 스탄과 나는 그저 의례적인 말을 했을 뿐 과히 많은 얘기를 나누지는 못했다. 그래서 난 몇 년 후 그에게서 10일 투어 연주를 같이하자 제안받았을 때, 많이 놀라웠었다. 난 내가 칙 코리아 대신에 교체된 것이었고, 그 때 함께한 밴드는 베이스주자 Stan Clarke와 드럼 Tony Williams가 함께하는 밴드였다. 이 짧은 연주여행동안 우리가 연주한 음악의 대부분은 칙 코리아의 것이었고, 난 내 눈에 특별하게 보이는 스탄이 이렇게 지극히 현대적인 음악을 소화해내는 데에 역시 전혀 부족함이 없다는 사실을 즉각 깨달았다. 그는 이 음악을 영혼과 그보다는 20살 정도 어린 사람의 것과 같은 생동감으로 접근했다. 그와 동시에 연륜과 경험에서만 뿜어낼 수 있는 예민함으로 다가갔다.
난 10년이나 지난 1984년까지 스탄과 다시 연주한 적이 없었다. 84년 이후 그와 함께 캘리포니아에서의 연주에 참여하게 되었다. 함께한 사람은 베이스에 George Mraz와 드럼에 Al Foster였다. 이번에 연주한 음악은 스탠다드, 발라드와 몇 곡의 Victor Feldman의 원곡의 혼합인 주류음악에 가까운 프로그램이었다. 우리는 이후 2년동안 정기적으로 연주했다.
이 2년동안, 일어났었던 한 일화는 나로 하여금 스탄 게츠 만큼 위대한 음악가가 자신에 대한 의구심으로괴로워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했다. 뉴욕 시티에서 연주할 때, 스탄은 나를 포함한 George Mraz와 드럼의 Victor Lewis가 함께 한 쿼르텟의 녹음을 준비했었다. 우리는 단숨에 두 번을 녹음했고, 돌연 스탄이 레코딩을 중지하자 했다. 나를 포함한 다른 멤버들은 말할 것도 없이 어리둥절했다.
왜냐하면, 우리가 했던 그 두 번의 녹음은 정말 최상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 다음날 스탄이 불렀다. 그리고 말하기를 너무 미안했다고 했다. 덧붙여 그가 그렇게 갑작스럽게 녹음을 중지시킨 것은 그 스스로의 연주방법이 자신을 당혹스럽게 느끼게 만들었다는 것이었으며, 사실, 술에 취하지 않은 맨 정신으로 그가 해 본 첫 녹음에 대한 부담감과 스스로를 이겨내려는 부담감이 함께 작용했기 때문에 괴로웠다고 얘기했다. 물론 스탄이 그의 연주에 있어서 부끄러움을 느껴야만 한다는 것이 나에게는 믿을 수 없었다. 또한, 나는 술과 같은 어떤 종류의 화학 보조제 없이 녹음에 대해 그가 느꼈을 압박과 불안을 이해한다. 이것을 인정한 그는 내가 그를 그냥 단지 위대한 음악가로서만이 아니라 진정 살과 피로 존재하는 인간으로 바라볼 수 있게 했다.
난 또 하나의 비슷한 사건이 떠오르는데, 그가 자신의 연주가 형편없다고 느꼈던 일련의 사건이다. 그는 나에게로 다가와서는 연주를 너무 못해서 미안하다 사과했다. 사실 그는 연주를 못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그는 그가 술마신 것 같은 느낌이라고 말했다. 그는 잠시 이야기를 할 수 있는지 여부를 물어봤고, 우리는 잠시 그렇게 얘기했다. 우리의 그 대화은 그가 술을 마시는 것을 막을 수 있었고, 다음날 아침 그는 무명의 알콜 중독 모임에 갔다. 이러한 두 개의 사건이 인간이 내포하는 모든 힘과 나약함과 함께, 스탄 게츠가 그저 평범한 사람이었다고 기억되게 하는 결정적인 요인이기도 하다.

1987년 여름동안, 스탄과 쿼르텟은 6주간의 유럽 투어에 임했다. 밴드는 베이스에 Rufus Reid, 드럼에 Victor Lewis와 나였다. 투어의 막바지로 가는 때, 우리는 코펜하겐의 몽마르트에서 연주하게 되었다. 이게 바로 덴마크 라디오에서 방송용으로 녹음한 연주이다. 몇 달 후 스탄이 이 녹음 테잎을 들었을 때, 연주 뿐만 아니라 그 음질 면에서 그는 감탄했다.
우리는 결국 음반으로 이 테잎을 발매하자고 폴리그램 프랑스와 협상했다. 녹음시간 때문에, 폴리그램은 두 개의 별도의 앨범으로 제작, 발매하기로 결정했다. 처음 것은 'Anniversary'라 불렸고, 그래미상에 후보로 지명받기도 했다. 두 번째 앨범은 1991년 3월에 발매되었고, 'Serenity'라 불렸다.
스탄의 건강이 안좋다는 것을 들은 것은 1988년이었다. 건강한 상태에서 처음으로 심장발작을 일으켰으며 종양말기라는 진단을 받았다.
그가 약물치료와 방사선 치료를 거부했기 때문에, 항암 음식과 다양한 중국산 허브로 엄격한 식이요법을 시작했다. 이러한 치료는 매우 효과적이어서 그의 건강은 다시 회복될 수 있었으며 1989년 여름까지 또 다른 6주간의 유럽투어에 임할 만큼 체력을 회복. 투어가 길었을 지라도, 우리는 많이 연주하지 않았다. 이틀 연주하면, 이틀이나 삼일은 쉬었다. 이것은 스탄의 건강을 위해 고려한 결정이었다. 내가 했던 가장 여유있는 투어 중 하나였다. 많은 리뷰어와 비평가들은 유럽에서의 연주에 관하여 마치 스탄이 살아있을 때에 들을 수 있는 마지막 연주인 것 같다고 썼었다.
스탄은 이 모든 것이 참으로 놀랍다고 보는 것 같았다. 그들은 그의 임박한 죽음을 공표했고, 행복해 보이고, 건강해 보이고, 이전에 없이 훌륭한 음악을 연주했다고 발표했다.

투어 후 몇 달이 지나, 스탄으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그가 최근에 A&M Record과 녹음 계약을 성사시켰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이 레이블과는 처음하는 이 녹음을 위해 L.A로 와서 함께하자는 요청을 했다. 내가 스튜디오에 갔을 때, 그곳에는 두 명의 신서사이저 플레이어와, 두 명의 기타연주자, 퍼쿠션니스트, 전자 베이스 연주자와 드러머가 있었다. 난 정말 우리가 하려는 게 대체 무엇일까 너무 궁금했었다. 그것은 바로 아르헨티나 출신의 유명한 작곡가 Eddie del Barrio가 편곡한 브라질 팝이었다. Herb Alpert가 프로듀서였다. 그 앨범이 'Apasionado'이고, 이것 또한 그래미상 후보에 지명되었었다.
1990 여름동안 우리는 4주 유럽투어를 했다. 이 'Apasionado'앨범을 홍보하기 위한 일정이어서, 우리는 신서사이저 연주자와 함께 앨범에서 발췌한 곡으로 연주했다. 그러나 또한 우리가 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잘 편성된 쿼르텟 음악도 연주했다. 일전의 투어와 같이, 이번 투어도 꽤 많은 날을 쉬면서 여유있게 일정을 잡았다.
그 투어동안, 암으로 고생하시던 나의 장모님이 위독하다는 전화를 아내로부터 받았다. 나는 혼란스러울 아내와 함께 하기위해 스탄에게 말하고 집으로 돌아와야만 했다. 금요일에 뉴욕에 와서 일요일에 다시 유럽으로 가는 일정이었다. 결국 일요일에 장모님이 돌아가시고, 난 다시 스탄에게 전화해서 장례식이 끝나기 전까지는 못 돌아갈 거 라 했다. 그는 나에게 걱정하지 말라 했고, 이 틀 후에는 전화해서 그런 아픔을 격고 있는 아내를 혼자두고 온다는 것은 너무나도 어처구니 없는 일이라 하며, 그의 비용으로 그녀를 유럽 투어에 함께 대동할 것을 선처해주었다. 내가 절대로 잊을 수 없는 그의 따스함이다.
내가 앞에 언급했듯이, 사람들이 스탄에게 듀오앨범을 제안했던 것도 바로 이 투어였다. 1990년 11월 난 스탄에게 연락을 받았고, 이 계획은 실행되었다. 3월 초에 스탄이 뉴욕으로 왔고, 아마도 우리가 연주하기 좋아하는 것들로 몇 번 녹음했다. 그와 나는 우리가 처음으로 연주했었던 보스턴의 찰스 호텔에 갔었다. 우리가 리허설을 못했었기 때문에, 그 첫 연주는 그냥 러허설로서 제공된 연주였다. 그것은 음악이 수렴하는 일반적인 방향의 종류이다. 이틀 후에, 우리는 쉬었고, 코펜하겐에서 4일밤동안 몽마르트 카페에서의 실황은 녹음하고, 연주했다.
내가 그렇게 스탄을 못 본지 6개월이 지났다. 내가 그를 뉴욕에서 봤을 때, 그가 얼마나 야위었으며, 그의 얼굴은 침체되었는지 알아챌 수 있었다. 그리고 너무나 피곤해 보였다. 몽마르트에서 그는 아픈 모습 중 예외적으로 잘 연주했고, 그는 그의 매 솔로마다 혼신을 다했다. 그러나 각각의 솔로곡이 끝날 때마다, 말그대로 힘겨워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것은 나에게 그의 건강이 별로 좋지않다는 명백한 증거였다. 그래서 파리에서 우리는 하루를 쉬고, 하루 더 연주했다. 이 연주동안 딱 한번, 스탄이 그가 너무 힘들어서 계속 할 수 없으니, 한 곡만 솔로로 연주해달라 했었다.
그 연주 후에, 스탄은 캘리포니아로 돌아가면, 새로운 암치료를 시작할 것이라 했었다. 또한 그는 1991년 여름에 짧은 투어를 계획중이기도 했다. 우리는 작별인사를 나누었고, 다음 연주일정이 확정되면, 연락하리라는 말을 하고 헤어졌다.
다소는 내가 스탄 게츠를 다시는 못 볼거라고 짐작했었다. 나는 그가 죽기 전까지 약 4주동안 그의 상태가 어떤가? 전화했었다. 그 때마다 그는 많이 좋아졌다 했고, 듀오앨범과 7월 4일에 파리에서의 공연과 관련해서 너무 기뻐하며 얘기했었다. 이것이 그와의 마지막 대화였고, 그는 1991년 6월 6일에 타계했다.
이 앨범 음악은 매우 특별하다. 스탄 게츠의 마지막 남겨진 녹음이라서일 뿐만 아니라, 그의 암과의 투병에서는 오는 고통에도 불구하고, 아니 어쩌면 고통 때문일지도 모르는, 그 음악이 사실적이고, 정직하고, 순수하고 아름답기 때문이다.

글 / 케니배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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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탄 게츠 (Stan Getz)

1927년 2월 2일 미국의 필라델피아에서 태어났고 1991년 6월에 사망했다. 15세 때부터 직업적으로 활약하기 시작하여 모던재즈의 초창기에 두각을 나타냈다. 바프의 영향을 받고 베니 굿맨 등의 악단을 거쳐, 1947년 우디 허먼악단에 참가하여 신선한 느낌을 주는 독주로 주목을 끌었다.
1963 스탄 게츠 최고의 앨범이라 평가받는 [Getz & Gilberto]를 발매하였으며, 1964년 제7회 그래미 어워드 최우수 재즈 연주, 올해의 앨범, 올해의 레코드, 1983년 Big Band and Jazz Hall of Fame 등록, 1991년 제34회 그래미 어워드 최우수 솔로 재즈 연주 수상 등의 성과를 거두었다.
1991년 6월 간암으로 사망 하였다.

주요 음반으로는 Round Midnight, With Guest Artist Laurindo Almeida, Sweet Rain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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