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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uis Armstrong (루이 암스트롱) CD / The Very Best Of Louis Armstrong

레이블 : Verve
출시일 : 2001/12
장르 : Best
상태 : 품절
판매가 : 15,000
할인가 : 12,400 원 (120)
수량 :
CD 1
01 ) What A Wonderful World
02 ) Cheek To Cheek
03 ) Let's Called Whole Thing Off
04 ) Nobody Knows The Trouble I've Seen
05 ) Uncle Satchmo's Lullaby
06 ) La Vie En Rose
07 ) C'est Si Bon
08 ) Hello Dolly
09 ) Kiss Of Fire
10 ) Let's Fall In Love
11 ) Dream A Little Dream
12 ) Can't We Be Friends
13 ) Summertime
14 ) I Love Jazz
15 ) When The Saints Go Marching In
CD 2
16 ) Mack The Knife
17 ) Because Of You
18 ) Your Cheatin' Heart
19 ) What's New
20 ) April In Paris
21 ) Swing Low, Sweet Chariot
22 ) Falling In Love With You
23 ) La Cucaracha
24 ) Blueberry Hill
25 ) That Old Feeling
26 ) Stars Fell On Alabama
27 ) Stormy Weather
28 ) I Was Doing All Right
29 ) Body And Soul
30 ) Love Is Here To Stay  
The Wonderful World of Louis Armstrong All Stars: A Gift To Pops
New York & Chicago 1925-1940
The Ultimate Louis Armstrong Collection : The Real... Louis Armstrong (3CD)
진정한 예술을 추구했던 광대의 삶

루이 암스트롱 (LOUIS ARMSTRONG) 1901-1971

흔히 재즈라는 음악의 성격을 정의할 수 있는 의미로 '대중 예술'이라는 단어를 선택하곤 한다. 대중성(Popular Music)과 예술성(Art)라는 상반된 속성을 함께 품고 있는 이 모호한 음악을 설명함에 있어 루이 암스트롱은 가장 적합한 대상이 될 것이다. 그는 20세기에 파생된 재즈를 상징하는 인물이었으며, 한편으로는 '재즈는 예술이다'이라는 신앙을 지니고 있는 팬들 사이에서는 그를 재즈 아티스트로서 수용하는 것은 어쩌면 견디기 힘든 굴욕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즈의 역사에서 반드시 알아야 할 단 한 명의 존재를 꼽으라면, 듀크 엘링턴도, 찰리 파커도, 마일즈 데이비스도 아닌 루이 암스트롱을 말할 수 밖에 없다.
재즈의 성지라 불리는 뉴올리언즈에서 가난한 빈민의 아들로 태어나 재즈를 '미국의 음악'으로 고착시키고, 더불어 '아메리칸 드림'의 상징으로 자리하기까지 루이 암스트롱의 삶은 어둠에서 빛으로 향하는 '성공을 향한 질주'였다. 뒷골목을 방황하며 생존을 위한 사기와 폭력에 물들어 있던 소년 루이 암스트롱은 열 세 살 되던 해, 새해 축제에 들뜬 마음으로 거리에서 아버지의 권총을 들고 하늘에 난사함으로써, 소년원에 수감된다. 그러나 이 비극은 루이 암스트롱을 훗날 재즈의 황제가 되는 소년을 거리의 불량배에서 구제하는 계기가 되었다. 소년원에서 우연히 접하게 된 코넷을 연주하며 그는 운명적인 계시를 받게 되었고, 그는 단지 코넷을 보다 잘 연주하기 위해 칼로 자신의 입술을 찢는다. 덕분에 일생동안 자신을 따라 다녔던 별칭 새치모(Satchmo : 철의 입술)을 얻게 된다. 그는 고향에서 직업 뮤지션의 길을 결심하며 18세에 키드 오리 밴드에 가입, 1922년에는 당시 최고의 밴드였던 조 킹 올리버를 찾아 시카고로 향한다. 훗날 재즈 학자들이 재즈의 운명을 바꾼 3대 사건의 첫 번째 기점으로 기록되는, 1922년 루이 암스트롱의 시카고 상륙. 그가 시카고로 향함은 재즈의 중심이 뉴올리언즈에서 시카고로 이동함을 의미한다. 그의 하이 톤에서 솟구치는 강렬한 연주와 청중의 마음을 사로잡는 쇼맨쉽은 루이 암스트롱을 '최초의 재즈 스타'로 자리 매김 시켰다. 1920년대 중반 루이 암스트롱은 자신의 두 번째 아내 릴 하딘 암스트롱이 포함된 '핫 파이브 & 핫 세븐(Hot Five & Hot Seven)을 결성, 초기 재즈 레코딩사에 찬연한 빛을 발하는 걸작들을 수확한다.
루이 암스트롱의 초기 레코딩을 듣다 보면, 그의 트럼페터로서의 역량은 지금도 전혀 낡지 않은 신선한 사운드 그 자체임을 발견하게 된다. '재즈 트럼페터 중 루이 암스트롱의 영향권 밖에 놓여진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라는 단정은 결코 허구가 아니다. 루이 암스트롱의 가치는 재즈 보컬의 영역에서도 특별하다. 그는 재즈에 간접적 영향을 끼쳤던 블루스 보컬을 제외하고서는 최초의 재즈 보컬리스트로 기억된다. 루이 암스트롱이 허스키한 음색에서 불러대는 스캣은 자신의 트럼펫을 육성화 시킨, 인간의 목소리를 악기화 시킨 혁신적인 발명이자 발견이었다.
핫 파이브, 핫 세븐의 해체 이후 25년간 루이 암스트롱은 솔로 활동과 함께 당대 최고의 솔리스트를 규합한 '올스타즈'의 활동으로 대중들의 곁에 한 발 더 가까이 다가간다. 트럼펫 보다는 보컬리스트로, 밴드 보다는 솔로 활동에 치중하면서부터 그의 위상은 흔들리기 시작한다. 루이 암스트롱은 ‘재즈는 대중 연예 산업의 산물이다’라고 주장했다. 헐리우드에서 [상류 사회], [글렌 밀러 스토리] 등의 영화에 출연하는가 하면, 그의 트럼펫과 목소리로 팝 레퍼토리를 연주하는 빈도는 더욱 많아졌다. 쇼 무대에서 연주와 함께 만담을 곁들이는 것도 그만의 상품 가치를 드높였다. 재즈가 대중들의 관심 밖으로 조금씩 멀어질 때에도 루이 암스트롱만은 언제나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중심에 자리하고 있었다. 66년 비틀즈를 빌보드 1위에서 끌어 내린 것도 루이 암스트롱의 'Hello Dolly'였다. 그러나 루이 암스트롱은 팝 넘버를 부르면서도 자신의 음악의 본령이 재즈에 있음을 망각하지 않았다.
우리에겐 CF 배경 음악으로, 영화 [굿모닝 베트남]의 삽입곡으로 친숙한 그의 노래 'What A Wonderful World'는 부와 명성을 쫓아 재즈를 버렸다는 폄하에 아랑곳하지 않고, 음악 그 자체를 쫓았던 루이 암스트롱의 삶의 낙관적 삶을 대변한다. ‘진정한 예술은 많은 사람들이 함께 즐길 수 있는 보편적 미학을 함유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음악적 신념이었다. 1971년 7월 6일 뉴욕 자택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하기까지 루이 암스트롱은 대중들의 곁에서 재즈의 매력을 설파했던 선교사로서의 임무에 충실했다. 루이 암스트롱과는 사뭇 다르게 재즈의 귀족처럼 우대되었던 듀크 엘링턴 조차도 ‘루이 암스트롱은 재즈의 대명사였으며 항상 재즈와 함께 했다. 나는 그를 사랑했으며 존경했다’라는 말로 그의 가치를 대신했다.
루이 암스트롱은 숱한 논란에도 불구하고, 가장 영향력 있는 재즈 아티스트로 기억될 것이며, 그의 영향 속에서 트럼펫, 보컬, 재즈의 편곡과 화성은 현대적으로 진화할 수 있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재즈를 심각하게만 받아 들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루이 암스트롱의 삶은 말한다. 재즈는 당신의 지적, 문화적 허영심을 채우는 수단이 아니다. 재즈는 우리의 삶의 느낌들을 진솔하게 표현하는 대중들의 음악일 뿐이다. 루이 암스트롱은 스스로의 가치를 실천하기 위해, 대중들 앞에서 우스꽝스러운 광대로 자리했던 진정한 예술가였다.

Why Louis Armstrong ?

He Is The American
루이 암스트롱은 재즈 뮤지션으로서 세계를 순회하면서 미국의 친선 대사(America's Goodwill Ambassador)라는 공식적인 직함을 수여받았다. 그러나 그가 가장 미국적인 스타라는 조건을 충족시킬 수 있는 보다 중요한 입장은 다분히 정치, 사회적인 배경이 깊이 관여되어 있다. 루이 암스트롱의 탄생 100주년이 2001년임에도 불구하고, 이미 지난해 2000년에 루이 암스트롱의 탄생 100주년의 절반의 분위기는 무르익고 있었다. 루이 암스트롱은 생전에 스스로의 출생일을 1900년 7월 4일이라고 공언하곤 다녔다. 그가 생전에 남겨둔 미공개 녹음의 보존을 위해 힐러리 여사가 12만 달러를, 연방 정부에서 30만 달러를 지원하기도 했으며, 2000년 7월 뉴욕에는 암스트롱 기념관이 개관했다. 고도화된 자본의 논리가 지배하는 음반 업계에서는 백년 만에 찾아온 거대한 Anniversary Event를 외면하지 않았다. 20세기의 시점인 1900년생, 그리고 미국의 독립 기념일인 7월 4일 출생을 고집했던 배경에는, 위와 같은 억지를 통해서라도 '가장 미국적인 스타'라는 상징성을 획득하고자 했던 루이 암스트롱의 계산이 도사리고 있다.
루이 암스트롱은 흑인이라는 치명적인 결함에도 불구하고, 백인들이 결정하는 미국 엔터테인먼트 산업에서 최초의 스타로 자리매김 되었다. 그는 가난한 흑인 빈민굴에서 태어나서, 어린 시절 소년원에 수감되기도 했던 이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루이 암스트롱은 소년원에서 트럼펫, 코넷 연주자가 되겠다는 일념으로 자신의 입술을 찢었다는 의지형 인물로 각인되어 있다. 그리고 그는 그 목표를 성취했으며, 모든 미국인들의 사랑을 받는 명실상부한 스타가 되었다. 그의 이런 입지적인 인생의 부각은 미국은 모든이들에게 열린 기회의 당이며, 흑인들도 재능이 있다면 얼마든지 부와 명성을 획득할 수 있다는 정치, 사회적 이데올로기와 결연되어 있었다. 루이 암스트롱은 인종차별이라는 거대한 사회적 암을 지니고 있는 미국 사회가 현실적 고통을 망각할 수 있게끔, 미국의 흑인들에게 제공된 '아메리칸 드림'의 표상이기도 했다.

He Is The Negro
1960년대 많은 흑인 인권주의자들은 루이 암스트롱을 향해, ‘백인들을 위해 노래하고 연주한 우스꽝스러운 엉클 톰(Uncle Tom)에 불과하다’고 그의 존재를 폄하했다. 그의 후배였던 많은 흑인 재즈뮤지션들이 아프로 아메리칸의 문화적 유산임을 강조하며, 흑인들의 자부심을 고취시켰음과는 달리 루이 암스트롱은 백인들이 조장해 놓은 허구의 이데올로기에서 놀아난 한낱 광대에 불과했다는 것이 지배적인 의견이었다. 그러나 루이 암스트롱은 자신이 백인들의 어릿광대 노릇을 하면서 축적했던 부와 명성을 통해 미국 남부 지방학교의 인종차별 철폐와 가난한 흑인들을 위한 많은 기부 활동을 행하기도 했다. 비록 이런 흑인들을 위한 선행이 포장과 위장의 의미가 부가될지라도, 그는 흑인들의 음악이었던 블루스가 재즈의 어머니라는 사실을 가장 쉽고, 풍부하게 설명시킨 존재였으며, 또한 그 어떤 백인 연주자도 그의 음악성을 뛰어 넘지 못했음을 기억해야할 것이다.

He Is The Entertainer
루이 암스트롱의 가치를 가장 위대한 재즈 뮤지션, 또는 장르의 범위를 넘어선 20세기 대중 음악사를 빛낸 위대한 음악인으로 확대하더라도, 그 설명에는 부족함이 있다. 루이 암스트롱의 존재를 정확하게 규정하기 위해서는 재즈라는 제한도, 음악이라는 폭넓은 적용도 충분하지 않다. 그는 서구의 클래시컬한 배경에 적지 않은 열등감을 지니고 있던 미국인들이 20세기의 문화를 대중 문화로 설정한 후, 전 세계를 시장으로 바라봤던 미국의 연예 산업에 드장했던 최초의 전형적 스타였다. 그는 재즈 뮤지션인 동시에 1963년 'Hello Dolly'를 통해 미국의 팝 차트 1위에 등극했던 팝 스타였으며, [상류 사회], [글렌 밀러 스토리] 등 수백편의 영화에 출연했던 영화배우이자 뮤지컬 배우이기도 했다. 그는 언제나 무대 위에서 구수한 입담으로 청중들에게 웃음을 선사했던 '종합 예술인'이었다. 프랭크 시나트라, 엘비스 프레슬리, 비틀즈, 마이클 잭슨 이전에 20세기 미국 대중 음악의 슈퍼 스타 계보를 형성했던 루이 암스트롱은 ‘진정한 예술은 많은 사람들이 함께 즐길 수 있는 보편적 미학을 함유하고 있어야 한다’는 신념을 지니고 있었으며, 언제나 이러한 명제에 충실했다.


He Is The Trumpeter
루이 암스트롱은 재즈 역사상 가장 위대한 트럼페터이자 코넷 연주자였다. 그의 끝없이 고음에서 솟구치는 하이 노트 프레이즈와 언제, 어떠한 환경에서도 풍부한 스윙감을 잃지 않는 능력은 지금도 재즈 트럼페터, 다른 기악 연주자들의 귀감이 되고 있다. 하늘을 가를 듯 뻗어나가는 통렬한 애들립, 농밀한 구성으로 짜여진 앙상블, 진부한 틴 판 앨리를 새롭게 구조한 화성과 편곡은 그에게로 향하는 부당한 음악적 편견을 무색케 한다. 그가 악보를 읽지 못했다는 소문은 그의 천재적인 트럼페터로서의 감각이 낳은 허구의 신화이기도 했다. 루이 암스트롱의 초기 레코딩을 듣다 보면, 그의 트럼페터로서의 역량은 지금도 전혀 낡지 않은 신선한 사운드 그 자체임을 발견하게 된다. '재즈 트럼페터 중 루이 암스트롱의 영향권 밖에 놓여진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라는 단정은 결코 허구가 아니다. 루이 암스토롱은 1920년대까지 앙상블 음악이라는 고정된 관념에 쌓여 있던 재즈에 대한 인식을 본격적인 솔로 즉흥 연주를 통해, 재즈에서 솔리스트의 역할을 일깨웠던 최초의 플레이어이기도 했다. 그의 여유롭고 풍성한 스윙감을 동반한 트럼펫 솔로, 힘들이지 않고 4분 음표를 8분 음표로 분할하는 자유자재의 프레이즈는 1920년대 초기의 딱딱한 스타카토 솔로 스타일을 진화시키는 근원이 되었으며, 다채로운 코드 감각과 블루스에서 옮겨온 멜로딕한 연주는 스윙시대 뿐만 아니라 모던 재즈와 오늘에 이르기까지 모든 재즈 트럼페터에게 거대한 그늘로 자리하고 있다.

He Is The Vocalist
루이 암스트롱은 재즈 보컬이라는 개념을 최초로 그리고, 가장 구체적으로 제시했던 재즈 보컬리스트였다. 그가 노래하기 이전에도 재즈 씬에서는 많은 보컬리스트들이 활동하고 있었지만, 그들 대부분은 블루스 보컬리스트였을 뿐이었다. 이런 블루스 보컬리스트의 간접적 영향을 제외한다면, 온전한 최초의 재즈 보컬리스트는 루이 암스트롱이었다. 1920년대 핫 파이브 시절, 완성했던 기악적인 프레이즈를 옮긴 보컬 창법은 빌리 할리데이 뿐만 아니라 백인 크루너(Crooner) 보컬리스트 빙 크로스비와 프랭크 시나트라의 보컬 스타일에도 많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또한 그가 자신의 트럼펫 사운드를 보컬로 전이시킨, 특유의 허스키한 음색으로 불러대는 스캣(Scat : 무의미한 음절로 리드미컬하게 흥얼거리는 창법)은 인간의 목소리를 완벽한 하나의 악기로 대체시킨 음악사의 위대한 발명이었다. 그의 제안을 통해 재즈 보컬리스트를 평가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으로 스캣의 능력이 제시되었으며, 스캣이라는 방법론은 재즈 보컬의 고유성을 규정하는 최우선의 기준으로 자리하게 되었다. 훗날 스캣, 재즈 보컬의 교과서라 불리게 되는 엘라 피츠제랄드가 스캣의 모든 것을 전수 받은 곳이 바로 루이 암스트롱이었다.

(자료제공: 유니버설 뮤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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